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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rama

 

***

 기차가 멈춰 섰다. 벌겋게 달군 쇳덩이가 차가운 물에 녹듯 흰 연기가 철길을 가벼이 덮었다. 문이 열리자 남성은 비틀거리며 시멘트로 이루어진 승강장 밑으로 내려섰다. 또각. 차가운 시멘트의 감촉이 낡은 구두 끝으로 느껴졌다. 여기에 온 건 순전히 고집이었다. 그래, 순전한 고집. 집도, 직장도.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은 순전한. 아니,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는 거겠지. 손에 든 핸드폰은 액정이 깨진 채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피식, 그가 고개를 돌리자 기차는 마치 그를 비웃는 듯이 연기를 토하고는 검은 터널 안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기차가 사라지자 그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아니, 아직이야. 아직 답답해. 넥타이를 밑으로 당겼다. 털썩. 그가 주저앉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실크로 된 이것이 교수대의 밧줄처럼 목을 조이고 있었는지. 넥타이 끝이 깨진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어쩌면 이 밧줄의 매듭 묶는 법을 모르던 때가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에겐 꿈이란 게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저는 시간을 멈추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달마다 늘어나는 이자조차 멈추지도 못하지. 그가 웃었다. 멈추지도 못해. 그녀는? 킥킥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어느 순간 일그러져 흑흑거리는 울음소리로 변질되어버렸다.

 찰칵.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흐느끼던 그의 어깨를 멈춰세웠다.

 찰칵.

 반대편 승강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세웠다.

 찰칵.

 그녀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렌즈에 비친 그의 얼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찰칵.

 여자였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찰칵.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가 소리쳤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그가 뺨에 묻은 눈물을 비비며 말을 이어갔다. "왜 남을 함부로 찍는데요. 예?" 그의 말에 그녀는 파인더에서 고개를 떼고는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카메라 너머의 여성은 앳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생인 걸까. 생각해보면 지금은 모두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겠지. 휴학생이거나 공강이라 밖에 나온 대학생일 거란 생각이 들자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는 누그러졌다.  "그게 말이 됩니까. 당장 지우세요." 아, 네. 지울게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카메라를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했다. "잠깐.", "네?" 제가 그쪽으로 갈 테니 제가 가면 지우세요. 혹시 모르니깐. 아, 네. 그럴게요. 그는 승강장 경계선에 발을 걸치고는 터널 끝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선로를 가로지르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나 건너는 와중에 저 터널 끝에서 불빛이 번쩍이고는 나를 치어버리진 않을까. 무인역이라 기차는 멈추지도 않을 텐데. 왜 이제 와서 내가 겁을 내는 걸까. 남성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선로를 향해 떨어졌다.

 내가 왜 저 여자가 있는 쪽을 향해 가고 있는 거지? 그야 내가 찍힌 사진을 지우기 위해서잖아. 그냥 말로 해도 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못 믿는 걸까. 처음 보니까. 그럼 오래된 사람은 믿을 수 있어?

 사실 사진을 지워달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찍혀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사진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저 궁금했다. 그녀는 왜 여기에 온 걸까. 사진을 찍으러 온 걸까. 왜 나를 찍은 거지? 그것도 여러 번이나? 관심이 있어서? 그저 추잡하게 울고 있는 어른을 보니까 찍고 싶어서? 자갈이 발걸음에 파도 소리처럼 잘그락거리며 무너졌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왜 자신을 찍었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왔는지. 승강장 위로 올라온 그는 정장을 털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그에게 천천히 건네주었다.

 카메라를 든 그는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기 시작했다. "아, 제가 해드릴게요." 그녀가 그의 옆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더니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검정색이었던 화면이 밝게 들어왔다. 그였다. 회색 승강장 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정장을 입은. 이렇게 볼썽없는 표정이었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버튼을 누르자 그가 또 나타났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메라로 찍어서 그런지 이렇게 선명하구나. 핸드폰으로만 찍어서 그런지 카메라의 사진은 무척이나 선명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사진을 찍은 적도 없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장이라도 찍어 놓을걸. 핸드폰으로는 찍긴 했었지만.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감촉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얘는 이런 비싼 카메라를 어디서 구한 거지? 사진 찍는 게 취미인가? 그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흐릿한 목소리처럼 흐릿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표정이 어두운데 혼자 사진이나 찍고 다니는 거겠지. 보통 저 또래들이면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면서 찍거나 남자친구와 사진을 찍기 마련인데. 삑, 아. 그녀의 목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그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

 "미안해요. 일부러 보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가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무턱대고 찍어서 더 죄송한걸요." 두 손으로 음료수를 받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되게 조용하네. 사람도 안 오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그녀가 있는 승강장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지 무척이나 낡아 보였다. 녹슨 철망 사이로는 녹 빛 풀들이 꿰뚫고 있었고 기둥은 몸체가 바스라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야 무인역이니까요. 기차도 잘 오지도 않는 곳이에요. 오더라도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더 많고." 그녀가 음료수를 홀짝였다. "그래도 자판기는 있지만요.", "그러게 자판기는 있지만." 그는 한 번 더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홀로 앉은 채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그녀가 결혼한 사람이라니. 누구와 결혼한 걸까.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할까. 나도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소를 가벼이 지었다. "의외라고 생각하셨죠?" 그녀가 말했다. "응? 아아, 학생인 줄 알았거든요." 학생 맞아요 저. 무미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말 편하게 놓으셔도 돼요.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고, 음료수도 주셨는데." 그녀가 음료수를 흔들자 찰랑거리며 소리 냈다.

 "그럼 편하게 말 놓을게. 그나저나 진짜 몰랐어. 결혼했었다니…. 언제 결혼했는데?" 그가 그녀 옆에 쭈그렸다. "한 달 전에요." 얼마 안 됐네. 어때 결혼해보니까. 항상 알콩달콩 하고 그러지만은 않지? 아닌가 아직은 좋을 때인가? 나도 신혼 때는 엄청 좋았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아니더라고. 그가 말했다. 이미 몇 년은 지난 그에게 갓 결혼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도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응? "모르겠어요." 그녀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

 저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해도 사진을 찍히는 것은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뭐랄까, 사진에 내 모습이 나올 때마다 어떨까 두근거림보다는 어떻게 나왔을까 걱정이 먼저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걸요. 못생기게 나왔으면 어쩌지, 나는 왜 이렇게 생긴 걸까, 같은 이런저런 생각들이요. 그래도 있죠. 신기하게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얀 꽃다발을 들고 서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돼요. 마치 하얀 드레스와 꽃처럼 환한 미소를요. 그녀가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

 찰칵. 한 번만 더 찍을게요. 사진사가 검지를 펼치며 한 번 더를 외쳤다. 벙거지 모자를 비뚤게 쓴 중년의 사진사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화려하게 터지는 플래시, 봄날에 피어난 수국화처럼 퍼진 벨 라인의 치마, 손안에서 피어오른 하얀 꽃잎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아니,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걸까. 꽃이 지듯이, 활짝 피던 웃음도 서서히 엷게 시들었다.

 "아니, 좀 더 웃어봐요! 활짝, 활짝!" 사진사가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웃으라는 거구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웃는 법을 잊은 것마냥. "아이 참, 아까 전처럼 웃으셔야 하는데…, 좀만 쉬었다 다시 찍을까요?" 그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합니다. 좀만 쉴게요." 조명이 꺼졌다.

 긴장되시죠?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한 여성이 종이컵을 건네며 말을 꺼냈다. 정장을 입은 단발의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다들 웨딩 사진을 찍을 땐 긴장하는 법이에요. 리마인드라고 다시 찍는 사람들도 긴장해서 굳는데 처음은 얼마나 떨리시겠어요. 아, 혹시 처음 맞으시죠?"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두 번씩이나 결혼하겠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요. 그래도 원래 결혼 쪽에 관련된 일을 할 땐 조심해야 돼요. 저희 아빠도 긴장 풀어준답시고 신부한테 너무 자연스럽다고 혹시 처음 아닌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다가 글쎄 재혼한 사람이었다니까요!" 아빠요? 아…. 아까 사진 찍으시던 분이 그쪽 아버지셨구나. "네. 저희 아빠예요. 저는 아빠 밑에서 사진 배우고 있고요. 혹시 사진 좋아하세요?" 사진이요? 찍는 건 좋아해요. 찍는 건.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건, 그니까 제대로 된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게 된 이유는 그이를 만나서였어요. 그는 사진을 좋아했어요. 아주 많이. 저는 그땐 사진에 대해 하나도 몰랐거든요. 좋아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있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뭐랄까, 따라 한다고 해야 할까, 닮는다고 해야 할까. 그가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게 되고, 그가 싫어하는 것도 싫어하게 되는…. "그래서 사진을 좋아하는 게 되었구나. 그가 사진을 좋아해서." 정장을 입은 남성이 말했다.

 네. 처음엔 사진을 좋아하는 척했어요.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혹시나 나를 쳐다봐주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와 공통점이 하나라도 늘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로 그와 가까워졌어요. 사진도 좋아지게 되었고요. 어릴 적부터 기타를 배우려고 모은 돈으로 사진기를 샀어요. 그리고 사진기를 들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고요.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는 무척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렇게 동아리실에서만 만나던 우린 그다음엔 학교로, 그다음엔 거리로, 다른 곳으로, 더 멀리. 더 멀리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둘이서.

 이성과 둘이서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이었어요. 살짝 무섭기도 했고요. 그래도 좋아하는 그와 단둘이서 여행을 떠난 거라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 좋아하는 그와 손을 잡고, 그를 바라보며 웃고, 그와 입을 맞추고….

 "그땐 정말로 어렸었던 거 같아요."

 그녀가 그날을 떠올렸는지 눈을 감았다. "물론 지금도 어리긴 하지만요." 그는 그녀가 웃는 걸 바라만 보았다.

 아무튼 좋았어요.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마치 종이접기처럼요. 종이를 접어 무언가를 만들려고 할 때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종이는 구겨지고 찢기고 버려져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해야 하고,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그런 순서요.

 그 후 몸이 이상했어요. 속이 안 좋고 어지럽고 메스꺼웠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를 타고 집에서 살짝 멀리 나간 동네 골목 약국에서 사서 확인해봤어요. 두 줄이었어요. 새빨간 두 줄. 처음엔 잘못된 건가 싶어 설명문을 읽어보기도 하고 인터넷에 검색도 해봤어요. 그래도 두 줄이 의미하는 건 변하지 않더라고요. 그제서야 알게 되었어요. 아, 나는 순서가 틀린 종이접기구나.

 사진을 좋아하냐는 사진사 딸의 말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입 밖으로 겨우 나올 수 있었던 건 "찍는 건."이라는 말뿐이었어요. 그러자 웃더라고요. 이쪽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 리가 없겠지만요.

 "와 진짜요? 어쩐지, 여기 오실 때 사진기 들고 오시는 거 보고 생각했죠." 그녀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럼 사진기는 왜 들고 오셨어요? 사진 인화하시게요?" 그녀의 말에 문득 시선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카메라 가방으로 흘러갔다. 인화. 그러고 보니 사진을 찍기만 했지 인화한 적은 없었구나. 하긴 당연했다.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것도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찍은 거니까. 그래도 사진을 찍는 건 좋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었으니까. 나에게 있어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일기와도 같았다. 그와 함께 있었다는 걸 나타내주는 일기.

 "아뇨, 인화는 아니고…."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저는 또 겸사겸사 웨딩 사진도 찍을 겸 사진도 인화하러 오신 줄 알았죠." 인화는 아니에요. 인화를 하려고 사진을 보면 그때 기억들이 떠오를 테니까요. 나는 말을 내뱉지 못한 채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아. 그녀가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남편분, 아니지, 약혼자는 어디 계세요? 아직 안 오셨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살며시 눈을 감은 채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 아마 옛날 일을 떠올리는 거겠지.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갔다. 갈라진 틈 위로 하얀 꽃이 짓이겨진 채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약혼자는, 약혼자는 갑자기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어요. 실은 약혼자 따윈 없어요. 실은. 그녀가 숨을 내쉬었다.

 "일이요?" 사진사 딸이 나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안 됐는지 눈을 깜빡였다. "네. 일이 있어서 급히 외국에 갔거든요. 사실 미루는 게 좋겠다며 말한 적도 있지만 저는 뭐랄까, 왠지 영영 못하게 될 거 같아서 이렇게 고집을 부렸어요." 거짓말이었다. 순전한 거짓말. 전부 거짓말인데 신기하게도, 신기하게도 책을 보며 소리 내서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아마 내 마음속 어딘가가 이런 말을 해야 할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앞으로도 남들을 이렇게 속여야만 하는 걸까. 앞으로도 계속….

 "죄송해요. 잠시 화장실 좀…."

 "아 네, 여자 화장실은 나가셔서 이 층 계단 위에 있어요."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바깥을 쳐다보자, 거리에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보에도 없었던, 차가운 비가.

 결국 웨딩 촬영은 그렇게 끝이 났어요. 기뻐서 울든 슬퍼서 울든 눈물을 흘리면 화장이 엉망이 되어버리잖아요. 보통은 하루 내내 촬영을 하지만 하루종일 찍고싶지 않더라고요. 거기다 약혼자도 없어서 둘이서 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었기도 했고…. 그녀가 꽃을 어루만졌다. 어긋나버린 거예요. 저란 존재가.

그날은 비도 내렸어요. 아무도 내릴 줄 몰랐던 비였어요. 보통 그런 비는 남들에게 미움을 받아요. 생각도 못 한 채, 예상치도 못한 채 내리는 비니까요. 그런데 있죠, 저는 그런 비가 좋아요. 신기하죠? 뭐랄까, 꿋꿋한 거 같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아무도 있었는지도 몰라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주고, 그저 짜증만 일으키고 욕만 먹는…. 그런데도 그 비는 멈추지 않고 쏟아져요. 마치 말하는 거 같아요. 이것 봐라. 나는 그래도 존재해. 너네가 뭐라고 말해도, 나는 이렇게 살아있어. 라고.

물론 갑자기 내리는 비인데 우산이 있을 리가 없었죠. 벙거지 모자를 쓴 사진사 아저씨가 우산을 건네며 쓰고 가라고 했어요. "그래도 넌 거절했고?" 네. 비를 맞고 싶었거든요.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귀찮게 돌려주러 다시 와야 하잖아요."

 그랬구나.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떼었지만 이내 다시 다물었다. 뒤에 덧붙일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녀가 웃는 걸 보고 있다 보면 말하려는 말도 까먹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웃음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어긋나버린 것만 같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도 말해줄 수 없을 테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가 내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하늘이 납색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교차로의 신호등이 깜빡였다. 하늘에 떨어지던 빗방울 하나가 홀로 내 눈가로 떨어져 뺨을 거칠게 그어버리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쓰라렸다. 베인 곳을 만져보았지만 손가락에는 붉은 선혈 대신 눈물만이 흐르고 있었다. 서러웠다.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가슴에 커다란 바늘이 박혀 저미는 것마냥 너무나도, 너무나도 미쳐버릴 정도로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다. 교차로를 바라보자 뛰어가던 사람들은 어느새 다들 색색의 우산을 피어 올린 채 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나만이, 나만이 멍하니 선 채 비를 맞고 있었다. 푸른빛이 붉게 물들었다.

 "사진첩을 손에 들고, 온몸이 비에 젖은 채 집에 들어갔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머니는 주저앉아 있고 아버지는 술도 잘 못 드시면서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제 손에 들린 사진첩을 보시고는 제 뺨을 치셨어요. 그때 처음 아버지에게 맞아 본 거예요." 받아들이지 못하신 거구나. 그의 말에 그녀가 답했다. "그렇겠죠. 아마도." 흐릿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머리칼이 하얀 꽃처럼 살랑 흔들렸다.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 돈. 제 돈이 아니었어요." 그 돈이라니? 사진이요. 그 돈은 제 돈도 아니었고, 사진 찍으려고 받은 돈도 아니었어요.

"그 돈, 그가 준 돈이었어요. 저희 가족이랑도 합의했대요. 이걸로 다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라고."

 웃기죠? 정말로 쉽게 말하더라고요. 마치 무슨 노트에 끄적인 낙서를 지우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손쉽게 말했어요. 처음엔 전화를 걸어서 그한테 온갖 욕지거리를 쏟아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통화음 너머로 응…,이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마음이 마술처럼 사라져버렸어요. 소리쳐야 하는데, 너 같은 새끼 참 역겹다며 욕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다가 가슴속에 걸렸는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결국 저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고, 그는 계속 미안…,이라는 말만 했었어요.

 "이런 짓까지 저질러 놓았는데도 딸이란 것은 그 돈으로 치르지도 않을 웨딩 사진을 찍었으니까 화나신 거겠죠." 그녀가 일어났다. "그러더니 다음 날, 제게 봉투를 하나 주시더라고요. 가족들 여행 갈려고 모아둔 돈이었대요. 이번엔 저보고 제대로 가라면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매인 걸까. 아니면 그저 말하기 싫은 걸까. 선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녀가 멈춰 서고 나서야 그가 물었다. "그래서 결국, 간 거야?" 그의 말에 그녀는 몸을 돌리고는 흐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저씨는 사진 좋아하세요? 사진? 글쎄, 잘 모르겠어. 사진을 별로 찍어본 적이 없거든. 그런가요. 응. 근데 요즘은 가끔 사진을 많이 찍어둘 걸이라는 생각이 들어. 뭐랄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지는 거 같아. 좋았던 기억도, 슬펐던 기억도, 기억하고 싶은, 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전부. 그는 그녀의 카메라를 들고는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보다는 남을 찍어줬어야 했는데." 손가락에 낀 반지가 가늘게 떨렸다. 기차소리였다.

 "있잖아요, 한 번만 저를 찍어주시겠어요? 그 카메라로."

 "이걸로?"

 "네."

 "아, 그리고 제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어요."

 "뭔데?"

 "사라지지 않잖아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 내가 지금 느끼는 것, 슬프든 기쁘든, 전부….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요." 그녀는 가슴 위로 손을 살짝 올렸다. 손이 서서히 밑으로 흘러내려갔다. 기차가 연기를 토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시간을 멈출 수 있었구나.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어 그녀를 조준했다. 뷰 파인더 속의 그녀는 여전히 흐릿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배 위에 멈췄을 때, 그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기차가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