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하면 방언으로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

 

"다 내 탓이오"

 

장로님은 오늘도 에쿠스를 타고 교회에 가고 있었다.

프라이드도 비켜서고 소나타도 뒤따른다. 경찰차를 따돌리려는 그 순간,

장로님은 차라리 조강지처가 좋은 썬연료를 밟으셨다.

 

순간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내 하나로 압축되고 만다. J.E.B.

 

우리에게 [여기에 텍스트 입력] 을 선사한 희대의 위인.

 

[여기에 텍스트 입력] 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정확히 부조리주의가 이 문장을 대변한다. 세상의 모든것들은 그에 맞는 목적이 있으며, 그로인해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음을 갖으며 그에 따른 신이 준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것은 인간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는 항상 모든 부조리라는 것에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한다.

[여기에 텍스트 입력] 은 시스템이 주어진 명령 속에 불복하며 자신의 주체를 찾으라는 요한 일렉트릭 바흐의 큰 뜻이라 볼 수 있다. 

뭐랄까 마치 [여기에 텍스트 입력] 은 미메시스를 보다 쉽게 이해 해준다고 해야할까? 누군가 [여기에 테스트 입력] 을 입력하는 순간 미완성 이라는 명사를 확실히 보여주지만, 이 [여기에 텍스트입력] 은 기존의 곡에 대한 미메시스를 더 확실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텍스트 입력] 이란 반드시 체제에 따라 무언갈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이를 통한 우리의 폐쇄성을 없애버려야 한다는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함축한 표현이며 , 이는 곧 무정부주의와도 연결되고 ,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까지도 연결된다. 그런고로 요한 일렉트릭 바흐는 이 모든것을 내다보고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여기에 텍스트 입력]. 

또한 유튜브가 거대한 시뮬라르크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때 텍스트 입력이라는 행위는 시뮬라시옹의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할 것은 여기에라는 지시대명사이다. 시뮬라시옹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실제하는 세계인가 혹은 시뮬타르크 아닌가 혹은 그 둘 모두를 포함한 것인가 또는 그 모두가 배제된 새로운 답인가?

이 물음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체험에 대한 불안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불러오는 현대인의 고뇌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개인은 고립되어갔다. 그들의 처연한 모습을 여기에 텍스트 입력이라는 짧은 문구를 통해 떠올린다. 에쿠스... 그들이 믿었던 건 예수가 아니라 천국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어지러운 현세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사리사욕을 채운 것이 아닐까?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에쿠스가 천국이다. 십일조를 모아 국산차를 사자! 에어백 각도가 잘 빗나가는 국산차라면 빠르게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렇게.. 장로님은 천국에 가셨다.

그리고 장로님 타시던 에쿠스는 목사님이 마저 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