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와버린 말을 다시 주울 수는 없었다.


한번 쏟아버린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아니, 여기서는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자였을 때의 내 상식 범위 안에서는 방법이 아예 없었다.


아까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지금은 아예 어색하게 바뀌어 버렸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으신건가요?"


"예.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래로 내려간 입꼬리를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해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나를 보던 흡혈귀의 표정에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래도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방금 정도의 양으로도 그런 출력이 나왔으니, 마법사 분이 오시기 전에 고치는 건 가능하십니까?"


"저도,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성공한 거라 어떻게 될 지 모르겠어요. 제가 고치려고 시도한 탓에, 마법진이 훼손되었을 지도 몰라요."


"…그렇습니까."


훼손되었다는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흡혈귀 본인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


방음 마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쪽의 벽을 쳐다보던 흡혈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혹시, 밤에 다시 와주실 수 있으세요?"


"올 수야 있겠지만, 어떤 일로… 아."


"네. 아무래도, 적은 양의 피라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 같지가 않네요."


손바닥을 펼치며 보여준 빛의 출력은, 확실히 아까보다 약해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빛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며, 오늘은 새벽에 자거나 밤을 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 마법사, 아리센이 오기 전에 방음 마법에 대해 고쳐야 하는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고장낸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흡혈귀를 도와서 방음 마법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게 된 건지.


슬슬 따뜻해지기 시작한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내 앞으로 흡혈귀의 손이 내밀어졌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그리고, 저는 '필리아'라고 해요."


"필리아, 필리아. 기억해두겠습니다. 저는 김주빈 이라고 합니다."


"주빈… 네, 잘 부탁드려요."


흡혈귀, 필리아의 이름을 혀로 몇번 굴려보며 악수를 했다.


서로 이름도 나눴고, 작별 인사도 했기에 더 할 일은 없었으니 현관으로 가서 슬리퍼를 신었다.


창문에 쳐진 커튼때문에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점차 밝아오는 것을 보면 아마 새벽은 진즉에 지나간 듯 싶었다.


필리아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 지 내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건네며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흡혈귀는 잘 때 석관이었나, 그런 곳에서 잔다는 말이 있다던데 사실인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확인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이 잔다는 데 멋대로 방에 들어가는 건 실례였고, 그리고 그 정도로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필리아를 곁눈질로 흘낏 봤지만 밖으로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아침이 되었다고 해도 추운 것은 변함이 없었다.


문을 닫고, 제대로 닫혔나 확인을 한번 한 뒤에 내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니 난방으로 돌아가는 보일러 덕에 집 안은 따뜻했다. 이 이상으로 돌렸다가는 낭비가 될 것 같았지만.


슬리퍼를 대충 현관에 벗어놓고, 보일러로 걸어가 난방을 껐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이 생긴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면 아침을 먹기에 적당한 시간이면서도, 필리아의 집에 꽤 긴 시간동안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약간의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살짝이지만 붉은 색으로 물든 반창고가 보였다.


최대한 얕게 찌른다고 해봤는데, 그럼에도 송곳니가 너무 날카로워서 상처가 좀 깊게 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한 조치는 되었으니 추가로 뭘 더 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인다.


대충 밥이라도 먹을 겸 냉장고로 가서 냉장실 문을 열어본다.


…마트에 간다는 것을 잊어버려서 텅텅 비어버린, 500미리 맥주 몇 개와 공장에서 만든 김치가 담긴 통 하나만 보였다.


김치만으로 밥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아침이 될 것 같았다.


피를 본 것도 있어서 오늘따라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차라리 나가서 먹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지만,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왔는 지 진동이 울렸다.


손 안에 든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금향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귀에 갖다댄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주빈. 금향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혹시, 아침에 밥 먹으러 오실 생각이 있으신가 물어보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저번처럼 말입니까?"


"네. 마음에 안 드신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마침 아침을 뭘 먹을지 고민하던 참이라, 가겠습니다."


"정말요? 금방 준비하고 있을게요!"


전화로 말해오는 금향의 목소리는 기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약간 귀가 아파올 정도였기에 귀에서 살짝 스마트폰의 거리를 벌리고, 금향이 다시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 상태가 안 좋은 건가 확인해보니, 벌써 전화가 끊겨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준비를 하고 가야할 이유가 생겼다.


어제 자기 전에 씻었으니 얼굴을 대충 닦고 가면 될 것 같았다.


또 속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거울에는 전에 보았던 피로에 찌든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다만, 이번에는 약간 혈기가 모자라 보이는 듯한 느낌이 얼굴에서 드러나있다는 점이 달랐지만.


약간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게 달라보인다는 게 꽤 인상적이었다.


남자였을 때에는 아파도 죽을 상으로 전혀 안 보였다는 점에서, 내가 보기에도 얼굴에 잘 안 드러나는 편이었다.


지금은 아주, 약간이라도 아프면 겉으로 잘 보였다는 게 문제였다.


…금향의 카페에 가게 된다면 알아보지 않을까.


한숨을 안 쉴래야 안 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청하도 어지간해선 카페에 올 테니 둘이 못 알아볼리도 없었고.


어떻게 해명해야 되는 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울에서 눈을 떼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찬 물 쪽으로 끝까지 돌려 틀었다.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물을 양 손을 모아서 받고, 얼굴과 귀의 뒷부분과 밑부분, 꼼꼼히 닦았다.


그 뒤에, 찬 물로 얼굴을 닦고 나서 거울을 보니 이제서야 겨우 볼만한 얼굴이 되었다.


제대로 닦이지 않은 부분이 있나 얼굴의 여러 부분을 거울에 비쳐보며 살펴보지만 이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밖으로 나와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저번에 입던 옷들은 전부 빨았으니, 오늘은 새 옷을 입고 갈 예정이었다.


옷장으로 걸어가 안을 뒤적거리며 적당히 입을 만한 옷을 찾아본다.


…날씨도 추우니 적당히 껴입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검은색 긴팔에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가벼운 게 마음에 들었던 외투를 걸치고, 청바지를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잊어먹은 게 없나 잠깐 집 안을 둘러보지만, 보일러도 껐으니 확인할 사항이 거의 없었다.


이대로 금향의 카페로 향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길한 예감이 떠나지를 않는다.


뭔가 더 챙기지 않으면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그러고보니, 오늘은 청하가 건네준 복주머니를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주머니라도 챙기러 갈 겸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스마트폰도 챙기지 않은 채로 옷만 입고 나갈 뻔 했다.


정말로, 나가기전에 깨달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게 청하가 건네준 복주머니로 떠오를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놀랐다. 청하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분명 이 일을 꺼내면 내가 도움이 될 줄 알았느니라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나를 귀찮게 할 게 뻔하다.


엉터리 말투가 그렇게 귀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청하 그 자체가 귀찮다고 해야 하나. 성격 자체가 나랑은 잘 안 맞는 것 같다.


…청하의 집에서 봤던 모습일 경우에는 예외같지만.


그때의 모습은 겉모습과 안 어울리는, 평소에도 볼 수 없었던 낯선 모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저게 원래의 성격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책상에 놓아둔 지갑과 스마트폰, 그리고 복주머니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다시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제 까먹은 것도 없었으니 이대로 나가면 되었다.


평소에 입던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추운 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가을 날씨에 맞지 않는 추위라 순간적으로 멈칫거리며 걸음이 멈췄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걸음을 옮겼다.


며칠만 더 지나면 가을이 아니라 겨울처럼 느껴질 것 같은 추위에 카페고 뭐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대충이라도 밥을 먹을까 싶었지만, 이미 준비를 다 한 상태였기에 한숨이 나왔다.


옆 집의 필리아에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닫는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니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이라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는 가을 날씨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바람을 뚫고 과연, 카페를 갈 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기는 했지만, 가겠다고 한 건 나였다.


그리고, 내가 하는 밥보다 금향이나 청하가 해주는 밥이 더 맛있었기에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끌리기도 했고.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해줄까 기대를 품고,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1층 버튼을 누르고, 닫히는 버튼을 바로 누른 뒤에 뒤로 돌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한 켠에서 열심히 광고를 송출하는 패널이 보인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광고에서 시선을 떼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금향에게 방금 출발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보낸지 얼마나 되었다고 알았다는 말이 문자로 왔다.


…폴더폰이라지만 나보다 치는 게 더 빠른 것 같았다.


나도 폴더폰을 사용한 적이 있었기에 저렇게 빠르게 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싶었지만, 드래곤이니까 사람과 신체 능력이 달라서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속도였다.


금향의 문자를 보내는 속도에 그렇다면 청하도 빠른 속도로 보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청하에게 오늘 카페에 오냐고 문자를 보내본다.


…빠르게 올 것이라 생각했던 문자는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청하는 올 생각이 없었던 건지 금방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는데, 오타가 많은 걸 보면 급하게 보낸 것 같았다.


급하게 보낸 것 치고는 너무 늦게 왔지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서 아파트 문 밖, 부지로 나갈 때까지 문자가 안 왔다.


이걸로 밝혀진 것은 청하는 생각보다 문자를 보내는 속도가 느렸고, 금향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빨랐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밖은 아파트 9층에 있었을 때보다 더 춥게 느껴질 정도로 바람이 쌩 쌩 부는 와중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서 자던 고양이 종족이나 새 종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에 날아갈 정도로 불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에 닿는 바람이 너무 쎄서 차라리 마스크라도 쓰고 오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은 금향에게 따뜻한 커피나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걸으려고 해도 느리게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나뭇잎은 가을이 다 지나간 것도 아닐 텐데 벌써부터 떨어저기 시작했고, 꽃의 꽃잎들은 바람에 휘날려서는 떨어진 지 오래였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해보이는 나무들도 몇 몇 보였다.


남자였을 때에 보냈던 가을보다 훨씬, 그리고 더 힘든 계절로 느껴졌다.


…가을이 이렇게나 힘든 계절이었나 싶었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아는 가을은 이렇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시기상으로는 여전히 가을이었다.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