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그런데요. 오늘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까지 생활비도 마다하지 않고 베풀 줄 아시는 분이 왜 본인께서 직접 데리고 살 생각은 안 하시는 겁니까? 같은 여자들이고, 이 아가씨도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예의바르게 말하려 해도, 말 속에 녹아있는 독기는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내 기분에서, 내 감정에서. 캐롤라인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안경을 고쳐쓰며 대답하였다.
 
 "저는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돌 양이 같이 오기에는 공간이 많이 협소하지요. 오늘 리돌 양이 이 곳의 크기에 대해서 대충 이야기를 해 주었고, 저도 오늘 와서 확인을 해 본 결과로는, 두 명이 살기에 부족한 공간 같지는 않군요."

 

 말을 진짜 막 던지네, 이 아줌마?! 아니, 이 5평짜리 방이 두 명이 살기에 부족한 공간이 아니라고? 지금 침대 옆으로 이렇게 세 명이,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앉아있는데도 방이 꽉 차는게 안 보여? 침대 위에서 둘이 같이 자라는 거야, 뭐야?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방 넓이를 평가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아이고, 이게 공간이 부족하지 않다고요?"

 

 내 완벽하게 어이없다는 말투의 대답에 뿔테 안경의 막말 투척가는 다 마신 주스잔을 내려놓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느꼈던 사실이지만, 사람이 양복을 입고, 차가운 도시의 여자 같은 분위기를 백날 풍겨 보아도 이 아줌마가 말하는 내용은 생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둘 다 빨리 내 집에서 내쫓지 않으면 나의 정신건강이 매우 위험해 질 것 같다. 여자들한테 물리력이라도 행사해야 하는 건가 하는 굉장한 고민에 빠져있는 그 때,
 엎어져 있던 캐롤라인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캐롤라인은 잠시 얼굴을 찌뿌리며 핸드폰을 쳐다보더니, 급하게 신발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나가버렸으면 좋겠다. 지금 눈 앞에 얼빵하게 앉아있는 이 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내 눈 앞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하얀 소녀는 여전히 그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어딘가 한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무슨 늑대소년마냥 집 안의 물건이 죄다 신기하다고 마구 어질러 놓지는 않으니 다행인 듯 싶다. 하긴, 자기보다 미개한 족속의 물건을 신기하게 여길 이유가 뭐가 있을까.

 

 "민재, 저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말하며 리돌이 가르킨 것은 - TV 프로그램을 틀어 놓은 모니터였다. 지금 나오는 장면은 수영장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하여 누가 가장 오래, 멀리 날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해외에서 하는 일명 버드맨 대회 같은 것을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흉내내는 장면이었다. 파라솔을 들고, 골판지를 휘두르고...

 

 "텔레비전이라는거야. 걍 우리말로는 테레비. 왜, 달에는 저런게 없나보지?"

 

 물론 테레비는 우리나라 말은 아니긴 하지만.

 

 "저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종의 의식입니까?"

 

 "사람들을 웃기려고 하는거야. 니네는 개그맨도 없나 보구나?"

 

 "개그맨?"

 

 "코미디언. 희극인. 야, 그 번역기 좀 영어도 되게 해 놔라."

 

 리돌은 고개를 갸웃 하고서는 다시 턱 아래를 매만지는 예의 제스처로 번역기를 조율하였다. 그리고서는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손뼉을 탁 치고서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사람 입니까?"

 

 "뭐... 재미있는 사람은 맞지." 

 

 "조금 놀랐습니다. 달에는 그것을 보여줄 차가 없습니다."

 

 자동차극장이냐, 무슨? 어디 개발도상국도 아니고 TV가 없어.

 

 "그럼 니네는 심심해서 어떻게 사냐? 우리는, 이거라도 안보면 하루가 정리가 안돼."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해라."

 

 "지금 명령하는거?"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거나 산책을 합니다."

 

 세계는 넓다 였나, 하여튼 각국의 문화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몇 번 본적이 있다. 하이드파크나 하여튼 유럽 각지의 넖은 공원에서는 걷는 사람, 혹은 책을 읽는 사람이 전부 다라고. 나름 유러피안이신가 보네요, 아가씨.

 

 "취미 한 번 고상하시네요."

 

 "지구인들은 너무 잔인합니다. 달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는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무슨 재미?"

 

 

 리돌은 다시 TV를 가리켰다. 

 

 

 "아, 저거? 수영장 들어가는게 뭐가 어때서. 여름이니까 시원한거 보여 주는거야."

 

 리돌은 대답 없이 TV를 바라볼 뿐이었다. 

 또 누군가가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엄청난 포말이 슬로우모션으로 입수장면을 과장하고 있었다. 잠깐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리돌은, 못 볼것을 봤다는 듯 자신의 팔을 감싸안고 고개를 돌리며 몸을 떨었다. 뭐야, 저런 장면도 한 번도 못 본건가?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에, 나도 무어라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상한 침묵이 방 안을 뒤덮었다.
 나는 겸연쩍게 그녀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야, 야. 진짜 무서운 거야?"

 

 "...그것은 무섭습니다. 달에서는 웅덩이 장례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장례식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돌. 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이제 맥락을 잡아 번역을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온 것도 같다. 가장 중요하게 들리는 단어만 다시 한 번 확인차 물어 보고, 그에 따른 전후사정이나 반응으로 때려 맞추면 얼추 들이맞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아가씨가 있는 곳에서는 물 웅덩이의 용도가 사람의 죽음을 위해서만 쓰인다 이거지? 

 

 "에이, 아까도 말했잖아. 이건 그냥 사람을 웃기려고 하는 거라고. 한국에서는 물에 사람을 빠트려 죽이고 막 그런 풍습은 없어. 물론 가끔씩 잘못되서 빠져 죽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리돌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걸 외국인이 싫어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다. 나는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서는 채널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채널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정치인 누군가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건조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전해지고, 수많은 취재진들이 라이트를 터트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공포에 떨었던 모습이 무색하게, 다시 리돌은 티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같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소식들이 계속해서 화면에 비춰졌고, 그녀는 아까의 물 공포증은 온데간데 없이, 호기심 많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변하였다. TV를 보면서 리돌은 흥분한 듯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단답형으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사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하는 것은 나 역시 우리나라 정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이 크기 때문이지만. 


이미 틀어놓은 뉴스가 중반부가 넘었기에, 야밤에 펼쳐진 시청각 교육은 금세 끝이 났다. 하지만, 예상 외로 마지막 일기예보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민재, 태풍은 무엇입니까?"
 
"비는 무엇입니까? 구름은 무엇입니까?"
 
"지도에 푸른 물 모든 부분 의미?"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하다. 리돌의 부모님 되시는 분께서 이 아이를 낳을 때 지워진 교육의 의무를 스루패스하셨던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엄청난 반항심에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괜찮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아이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제 곧 이 하얀 머리의 미소녀는 다시는 볼 일이 없어질 테니까. 이제 밖에서 전화를 받는 같이 정신나간 여자를 불러서, 나는 단칼에 둘 다 퇴거를 요청할 것이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힘든 하루의 마지막을 즐기겠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리돌은 광고를 보면서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 사회의 상식적인 면에 대해서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고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이 몸짓의 의미는 알고 있는지, 리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좋아. 그럼 이제 두 번째 단계다.
 
 무슨 놈의 전화를 이래 길게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떤 일이든지 다 좋으니 모두 제치고 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끝내자 - 아니, 나가라 - 라고 말하기 위해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없다.
 아무도, 없다.
 앞서 잠시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집은 옥탑방이다. 
 고개만 스윽 둘러보면 옥상 모두가 다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고, 숨을 곳은 없다.
 그런데, 없다.
 나는 황급히 계단으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계단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면, 소리가 울릴 것이다. 
 소리도, 없다.

 

 지금 이 아줌마, 도망간 거야, 설마?! 얘는 그냥 내비두고?!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어쩌라는 거지? 아니, 그렇게 책임감 운운하던 양반이, 자기가 맡아놓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도망간 거야 지금?! 이건 믿은 내가 병신이긴 한데, 아니지, 근데, 내가 누굴 지금 믿어서 이렇게 된건 아니잖아? 누가 이야기하다 말고 도망 갈 줄 알았겠냐고!

 아무 생각 없이 얽혀 가는 생각 속에서,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단서가 떠올랐다.

 갑자기 방 안으로 미친듯이 들이닥치는 나의 모습에, 리돌은 깜짝 놀란 듯이 그 빨간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문짝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오는 소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악귀로 변한 내 얼굴, 방 안으로 미친듯이 짓쳐 들어가다 삼선슬리퍼를 신고 그대로 방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뒤, 괴성을 지르며 열린 문 밖으로 슬리퍼를 집어 던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의 그것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 찾아야 한다. 아까 놓아두었던 지갑, 지갑 속에 분명히 아까 명함을 넣어 두었다. 전화, 전화를 해야해. 전화!

 책상 위의 휴대폰과 지갑을 갖고, 다시 들어오는 동작 그대로,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황급히 지갑 안에 명함을 후벼 찾았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받지 않는다.

다시 걸어본다.

 

뚜- 뚜-
띠-띠-띠-띠-

 

....전화 가는 중에 통화중 연결음이 떠?! 
이 경우는 딱 하나다. 받는 도중에 배터리를 뽑아버린 거다. 
나는 분노, 불안, 공포 등 모든 부정적인 심리상태가 한 곳에 모인 검지손가락으로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나는 머리에 손을 짚고 옥상 중앙에 있는 평상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간신히 몸을 가누어 평상에 누웠다.

 어쩔 수 없이 쳐다본 밤하늘의 보름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다. 태양 대신 서울의 밤하늘을 밝게 비추어 내리는 달빛은, 차갑게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단지, 입 사이로는 단 한 마디가 비어져 나올 뿐이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