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점등된다. 고개를 푹 숙인 사람들이 하나 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하얀색으로 색칠된 횡단보도를 밟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개를 숙인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더 숙일수록 좋으니까. 검은 신발을 신은 내 발만을 보며 건너편으로 도착했다. 

 

겨울 공기는 건조하고 차갑다. 마치 죽은 사람들의 영혼처럼,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눈물을 훔치며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몸을 던진 사람들의 무거운 영혼만큼이나 서럽게 차갑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들처럼

 

눈물을 훔치며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몸을 던진 사람들의 영혼처럼

 

무거운 영혼이 될 것이다.

 

차갑고, 무거운 영혼이 될 것이다.

 

그동안 괴로웠었다.

 

밤이면 방문을 닫고 잘 펴진 이불 위에서, 그 이불이 흐트러질 정도로 조금씩 몸부림쳤다. 가슴 한가운데가 차가워질 때 마다, 한기가 느껴질 때 마다 눈을 감았다. 질끈 감아서, 그 고통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가슴이 차가워졌다.

 

너무 차가워져서 어쩌면 발끝부터 머리까지 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이 되면 좋으려나.

 

*
너를 만나기 위해 OO고등학교 앞 정문에서, 야간자율학습이 끝날 시간까지 기다렸다. 정문 옆 나무에 기대어 정문에서 빠져나오는 아이들 중에 네가 있는지 지켜보았다. 너는 학교 친구들과 같이 나왔다.

 

-준영아

 

나는 네 옆으로 다가가 손끝을 어께 위에 놓으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너는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내 얘기 좀 들어 줄래. 이제 앞으로 보지 않을 테니까-.

 

너는 어색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하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며 말하듯, 높낮이가 없는 어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고개를 떨며 숙인 채로 말을 시작했다.

 

…있지, 일단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전에, 네가 좋아서 껴안은 것, 손을 만진 것, 너를 귀찮게 했던 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분명 너는 불쾌했겠지, 혐오감이 들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도 있잖아, 미안해. 말하면 안 되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말하고 싶었어. 내가 고백을 했을 때, 조심히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을 때, 네가 나를 밀쳐냈던 것도, 큰 소리로 “저리 꺼져.”라고 했던 것도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었긴 해도. 이제는 깨달았어. 책에서 읽었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사랑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상대가 완벽하다고 내가 인식해야만 하는 것. 여자가 두 손이 다쳐서 남자가 모든 집안일과, 돈벌이를 해야 할 때, 또는 그 반대일 때, 사랑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것. 그런 걸 알게 되었어. 그걸 알았을 때, 세상도 알게 되었어. 간절히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아픈데 내가 살기 위해선 고통을 느끼면서라도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욕설을 듣고 참고 울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사실 싫증났어. 그러니까 고마워. 이해해 줘서. 이제 나는 갈게.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제 그곳을 달려나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시리고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얼마나 시리고 아파야 차갑고 투명한 얼음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시리고 아파야 흰 순백의 눈이 될 수 있을까. 

 

눈이 물이 되는 이유는

 

차가운 게 슬퍼서

 

자기 스스로가 눈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겠지.

 

나도

 

내 스스로 눈물이 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눈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눈이 되면 좋으려나.      

 

*
내 학원이 있는 빌딩의 꼭대기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묵묵하게 걸어 올라온 꼭대기층의 옥상문은 열려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려 있었으니까. 오늘도 열려 있구나. 무거운 쇠문을 두 팔로 힘껏 열었다. 초록색으로 색칠된 옥상으로 들어섰다. 귀는 바람 소리로 가득 찼다. 난간을 향해 걸어간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딛는다. 

 

*
그는 울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는 낮지 않은 난간 앞에서 숨을 고른다. 사람이 줄어들 때 까지 기다리며 사람들과, 건물들과,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조용히 보았다. 그는 마지막에 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고개를 숙이고 울면서, 천천히 난간 위로 발을 올려놓으려고 했다.

-뭐야 ㅅㅂ. 거기 잠깐만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달려왔다. 옥상 난간을 넘어 떨어지려고 했던 그는 다시 옥상에 발을 붙였다. 그렇게 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2화에서 계속>

==============================================================

일단 분명 재미없는 소설이지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분위기가 우울하지 않은가 싶은데 남은 화는 밝게 써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