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빨리 설명을 좀 해 보시죠?"

 

 어째서인지 나는 집 안에 돌아와 있다. 나의 어이없음의 최상급 표정을 동반한 질문에도, 캐롤라인은 대답 없이 내가 내어 준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이 아줌마는 며칠만에 봐도 하는 짓이 똑같구만? 하긴, 사람이 변하는 걸 그렇게 쉽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지 나한테 설명을 좀 해봐 이 양반아.

 

 지금 캐롤라인이 왜 내 집에 있는지, 나는 왜 밤산책을 가지 못하고 집에 돌아 왔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내려가는 길에, 캐롤라인과 아랫집에 이사온 것으로 추정되는, 아까 장보고 올라올 때 보았던 그 아가씨가 나의 보금자리로 올라오는 것을 바로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 다른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내 방으로 밀고 들어왔고, 덕분에 지금 내 방에는 이번 주 내내 나를 신경쓰이게 했던 세 아가씨들이 밥상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달나라 공주님, 개념없는 외국인 강사, 그리고 어... 엄청난 미인.

 

 세 명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말한 말마따나 캐롤라인은 그저 커피의 향을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고, 아랫층 사는 금발의 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쭉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리돌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그 아가씨를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다. 지금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두 개가 있다. 밖에 나가면 빠지지 않을 미인들, 그리고 이 갈색머리의 외국인노동자가 나의 집에 데려온 사람들이라는 것.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 입에서 해명을 듣는 것이다. 나의 해명을 요구하는 불타오르는 시선을 잠시 바라보던 캐롤라인은, 가만히 커피를 홀짝였다.

 

 10 초 후,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아니 저기!"

 

 나는 식탁을 쾅 내리치며 일어났다. 리돌과 내 오른쪽에 앉은 아가씨는 깜짝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지만, 역시나 이번 사건의 범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말을 제대로 들어먹지 않으리라는 것은 저번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냥 빨리 내 얘기부터 해 놓고 대답이나 기다리는 편이, 나의 정신건강이나, 시간절약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리돌 이야기만 해도 지금 당신한테 말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이거부터 물어봅시다. 지금 이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데 아직까지 소개도 안 하고 방치하고 계신 겁니까?"

 그 사이 또 한 모금을 홀짝인 캐롤라인은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놀래?!

 

 "아, 오늘 만나셨을 때 이야기를 다 들으셨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만났다면 만났죠. 그런데 딱 10초 봤는데요."

 

 아무리 스치면 인연이라지만 중간과정을 너무 광속진행 해 버린 거 아냐? 비켜달라고 한 마디 하는 시점에서 자기소개까지 줄줄이 튀어나오나? 왜? 아주 지금 이제 상 깔고 앉았으니까 다음 차례는 상견례라고 얘기하지?

 

 "그럼 지금 소개하면 되겠군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캐롤라인은 그 금발 아가씨에게 눈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는 또 다시 깜짝 놀란 듯이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참으로 훌륭한 대화 양상이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기가 나서서 소개해야 되는 거 아닌가? 자기한테 필요 없는 말만 딱딱 잘라 끊고, 나머지 사람에게도 속도를 강요하는 일방통행 화법. 다른 사람들도 적응을 못하고 있잖아, 지금.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금세 지우고서는, 갑자기 앉은 자세 그대로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걸 본 나도 당황하여 같이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뵈었었죠? 저는 김성희라고 합니다."

 

 침묵.

 

 침묵.

 

 끝.

 

 끝?

 

 보통 이런 자리에서 자기소개라고 하면 뭔가 더 이야기해야 되지 않나? 물론 이것은 이런 미녀를 더 알아보고 싶은 나의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왠지 내가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이어갈 타이밍을 뺏긴 듯 한데?

 웃으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 아가씨는 아, 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지구에서는 보통 이럴 때 자신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더 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왜지?

 갑자기 왜 기시감이 드는 거지?

 왜 평범한 노량진 한 구석에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지구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스케일 큰 대화가 이루어 지는 거지?

  나는 반사적으로 리돌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경계감 넘치는 눈빛으로 성희 씨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는 왠지, 이 뒤의 이어질 말을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거부감이 밀려 왔다. 그러나 대답을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저는 금성인입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입에서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네?"

 

 그녀는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지금 내 말에서는 전혀 감정이라고는 묻어 나오고 있지 않다.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이 금성인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굳이 말하자면, 척수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말이다. 이미 리돌이라는 달나라 사람을 만났고, 지금 저 아가씨는 '지구'라는 이야기를 들먹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의 원흉인 캐롤라인이 데려왔다. 삼박자가 딱딱 들어 맞는다. 이쯤 되면 외계인이라고 의심 안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다. 혹시 저 외국인 강사도 알고 보면 다른 행성 사람 아냐?

 

 "아...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저 금성인 맞아요. 지금 지구에서는 피팅 모델일 하고 있구요."

 

 "아니에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볼을 부풀렸다. 이야, 세상에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미인이  저런 표정을 지어준다니, 누구라도 화가 풀릴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나는 조금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제가 봐도 성의 없는 대답이긴 한데요, 그런데 성희씨라고 했나요?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좀 이해가 가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얘 보이죠? 들으셨나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자기가 달에서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는 이미 지금 집 안에 있는 저 달나라 소녀 덕분에 이미 지구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진저리가 쳐진단 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조곤조곤하게 금성에서 왔어요 라고 이야기하면, 에이 거짓말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아 그러십니까 하게 된단 말이죠."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물론 성희 씨가 제가 본 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긴 합니다만..."

 

 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겨? 예쁘다 예쁘다 생각만 하고 있다가 그냥 마음의 소리가 가슴을 뚫고 뛰쳐 나가 버렸나 보다. 다행히 그녀는 그저 그 이야기에 기쁜지, 만면에 미소만을 띄운 채 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두 번 하고서는 다시 말을 살짝 돌려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지금 저의 상태로는, 어떤 특이한 사람이 등장한다고 해도, 설령 이제는 화성인이나 목성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별로 놀라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죠."

 

 "그런가요?"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누구라도 사로잡힐 눈웃음을 내게 지어 보였다. 어이구, 미치겠네. 단지 저 한번에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명확하게 해야 할 사항이 있지. 나는 이제서야 잔에 커피를 다 비운 캐롤라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쯤 되면 말할 때도 되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마시고요. 지금 당신이 데려 온 사람이 모두 외계인들인데, 지금 당신만 지구인이라고 주장하면 좀 뭔가 이상하잖아요. 어디 분이십니까? 수성인? 아니면 성희 씨와 마찬가지로 금성인?"

 

 "그 순서라면 곧 맞추실 수 있을 것 같네요."

 

 "화성인? 목성인? 설마, 토성인?"

 

 캐롤라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중간을 빼먹으셨네요."

 

 그 사이에 무슨 행성이 또 있는데? 수금지화목... 퍽도 믿겠다.

 

 "아니,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하시는 게 말이 안 된다니까요?"

 

 "말이 됩니다."

 

 당신에게만 말이지. 어느 별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마이페이스가 또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 복장 터지는 태도로 일관할 수가 있지? 내가 이렇게 답답증이 터지거나 말거나, 캐롤라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