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아, 날아가거라!

 

5.찍새


최 노인을 데리고, 박기범이는 주유소에 들어섰다. 알바한테 사장님 계시느냐고 묻자, 두 사람의 희한한 몰골에 무슨 거렁뱅이 새끼들이 주유소 와서 사장 찾냐며 딴 데 가서 구걸하라는 식으로 쫓아내려 했다. 그러자 자기 꼴은 생각도 않고 화를 버럭 내며 그 드러운 손으로 알바 뒤통수를 휘갈긴다.

 

“야, 내가 누군 줄 알어? 내가 구 터미널 버스 운수 사장 박기범이야! 좀만한 놈이 까불고 있어. 얼른 사장 대령 안 해? 야! 찍새, 너 지금 형님 왔는데 안 나오냐, 이 새끼야!!”

주유소 한복판에 서성이며 차도 못 들어오게 하는 박씨 꼬락서니가 마치 어제 전자상가에서 스마트폰 사다 행패 부렸던 짓을 또 시작할 기세였다. 익숙한, 그러나 절대 그립지 않은, 절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그 목소리가 들리자 안정직 씨는 절로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이걸 나가야 해, 말아야 해, 안 나가자니, 오늘 장사 종칠 테고, 나가자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소란스러울 테고. 그런 와중에 알바가 개 맞듯이 맞고 있는 꼴을 보니 알바한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안정직씨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일주일 전부터 박기범이가 다시 산성시장 바닥을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아이고 맙소사 싶었던 안정직 씨. 이제는 좀 아버지한테 인정도 받아서, 사업도 물려 받아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는데, 꽤나 난감한 불청객이 나타난 셈이었다. 데면데면하이 웬일이슈 하고는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얻어 맞은 알바 안부부터 먼저 챙기며 사무실에 들여보내는 꼴이 박기범이 따위 전혀 환영해줄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박기범이는 최 노인을 놔두고 뻔뻔스럽게 사무실에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깥에 최 노인이 멀리 잘 떨어져 있나 눈치를 본 후 묻는 말이 잉크가 싸냐, 짜가 휘발유가 싸냐 였다. 짜가 휘발유 소리에 아 이제 그딴 거 몰라요, 손 뗀 지 오래에요 라고 안정직 씨는 고개를 돌린다.

 

“야, 형이 죽이는 사업 아이디어 하나 들고 왔어, 새꺄. 저기 노인이 잉크를 매주 한 가득 사는 사람인데, 잉크 살 돈은 전부 저 영감이 쥐고 있단 말이지.”

 

“……”

 

“야, 눈치가 안 서냐? 짜가 기름을 잉크보다 더 싸게 만들어서 저 영감 평소 사던 잉크 값의 차익을 우리끼리 뿜빠이하는 거야! 우리 옛날에 하던 사업에 비하면 좀 푼돈이겠지만, 매주 그 돈이 들어오면 모아서 꽤 커지지 않겠어? 어때? 더 싸게 할 수 있겠어?”

 

“요새 세상에 잉크를 얼마나 쓰길래, 그 해봤자 한 십만 원은 남겠어요?”

 

박기범이는 자기가 갔다 온 마을 이야기를 과장 섞어가며 그 곳에서 쓰는 잉크가 무척이나 어마어마함을 말해줬다.

 

“어때, 좀 싸게 만들 수 있겠어? 싸게 만들수록 뿜빠이할 돈도 커져.”

 

생각해보니, 저번과 달리 이 일은 저질러도 누구 다칠 일은 없겠네 싶었다. 맨날 푼돈 남기려도 사은품으로 줄 휴지 아끼고, 알바 월급 가지고 젊은 것들이랑 실랑이 하는 것도 마침 짜증나던 참이었다. 어느새 정직하게 살아야지, 박기범이는 쫓아내야지 하던 고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어떻게 하면 잉크보다 싸게 만드려나 하고 계산을 머릿속으로 착착 돌리고 있는 안정직씨였다.

 

“하기 나름이죠. 잉크면 뭐 대충 까만 색만 나오면 되나?”

 

“그렇지, 찍새!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만!”

 

그렇게 안정직씨도 찍새로 돌아오셨다.


6. 탱크는 찌꺼기 기름을 싣고


찍새 말대로 만들기 나름이었다. 찍새는 어떻게든 잉크보다 훨씬 싼 시커먼 슬러지 기름을 만들었고, 박기범이는 자비를 들여 잉크를 사야 하는 최 노인에게 마치 선심 써서 저렴한 잉크집을 소개해주는 것처럼 유혹한 후, 최 노인으로 하여금 앞으로도 찍새가 파는 잉크만 살 것을 종용했다. 물론 최 노인에게 마을에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싼 잉크집을 찾았다고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돈은 평소 가져오던 대로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왜 그래야 하지요 라고 편지를 보냈으나, 박기범이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싼 잉크 사고 싶지 않냐며, 불의의 사고를 당해 오늘만큼은 자기 주머니 털어서 잉크를 사야 하는 최 노인의 입장을 옥죄었다. 물론 박기범이는 사람들한테서 돈을 잘 걷어오면 차익의 일부를 떼서 최 노인에게 쥐어줄 것을 약속하며 그를 구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 두 주 탱크는 슬러지 기름을 싣고 주유소를 떠났다. 잉크의 냄새는 당연히 예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더 코를 찌르고 오래 맡으면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냄새가 깔려 있는 시돈 산 바깥의 이야기였다. 새 슬러지 잉크의 고약한 냄새 따위 시돈 산 안의 비둘기 구름 아래에 들어와 봤자 오십보백보였다. 새똥과 잉크 뒤섞인 구역질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신너 류의 화학 약품 냄새 정도로 바뀌었을 뿐.

 

가끔 몇몇 예민한 시돈 산의 주민들은 잉크가 예전보다 잘 뭉쳐서 편지 쓰기가 불편하다는 둥, 냄새가 심해서 어지럽다는 둥 이야기를 꺼내며 최 노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최 노인은 그런 항의 편지를 받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겁에 질려서 자신의 비리가 들킬까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답장으로 쓴다는 말이 잘 모르겠습니다 정도였다.

 

최 노인 같은 얼뜨기가 이런 자금 횡령 사기 조직의 말단에 앉아 있으면 보통은 일 시작하기도 전에 계획이 물거품 되었으리라. 사기 치려는 사람이 지레 겁을 잔뜩 먹어서 예비 피해자들을 제대로 끌어들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시돈 산이었다. 부부끼리도, 부모와 자식끼리도, 친구(if any)끼리도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을 꺼려하며 오직 편지로만 대화하는 나사가 조금 풀린 동네였다. 최 노인이 모르겠다고 편지로 쓰기만 하면 그가 어떤 죄책감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건 간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모르겠다 라고 읽을 뿐이었다.

 

편지가 쓰는 사람의 진실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한 탓인지, 사실 마을 전체에는 구성원 간에 꽤 깊은 불신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마치 마을 전체에 깔려 있는 잉크와 새똥 범벅만큼이나 깊고 질척하여, 말라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편지로 얼렁뚱땅 상대를 속여먹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속인 것을 알고 감정이 격해져서 미친 듯이 항의편지를 보내면 속인 측에서는 네 놈은 속이지 않았었냐는 식으로 역 항의편지를 보내는 게 상례였다. 이런 문답이 반복되다 보면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이 서로 간의 말꼬투리 잡아 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기 일쑤라, 오해를 풀기는커녕 주민 간의 감정의 골만 깊게 패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 놈의 족속들 사이에 흐르는 불신의 강물은 마르기는커녕 나날이 불어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왜 이런 기이한 동네에서 나가지 않고, 눌러 앉아 살고 있냐고 물으면,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마주하며 사는 바깥 세상이 두려웠다. 실시간으로 상대의 표정, 제스처를 읽어서 상대의 진심을 알아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역으로 자신의 표정, 제스처가 읽히는 것 또한 두려웠다. 서로 말 너머에 숨어 있는 진심을 알아내려고 끝없이 상대의 말을 이리 살펴보다 저리 살펴보다 결국 상대를 오해해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스스로 멋대로 남을 어떠하다라고 이해해버린 후 그것을 바탕으로 왜 너는 너답지 않게 행동하냐며 상대와 끝나지 않을 말싸움, 몸싸움을 벌이는 데에 질려버렸다.

 

그렇게 속고 속이는 바깥 세상에 살다 지쳐버려서 급기야 다른 사람의 얼굴 보는 것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한 곳으로 모였다. 원래 이 곳은 수화를 배우지 못한 실어증 및 발성기관 장애인들이 모여 살며, 필담으로 이야기 나누는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오늘날 이 곳 시돈 산의 비둘기 마을이 되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새똥을 맞지 않기 위해 우산을 써야 해도, 비둘기 구름에 뒤덮여 1년 내내 날씨가 우중충해도, 귀찮게스리 이야기 하려면 항상 종이와 잉크가 필요해도, 모든 생필품은 공동배급제로 받아야 해도, 전기 하나 안 들어오는 빌어먹을 산골마을에 밤에 뭐 좀 보려고 하면 불 밝힐 물건이 등불 밖에 없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고 속이는 게 두려워서 이 곳에 왔으면서도 다시 아귀 떼들 같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짓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 곳에서 살겠다고 독하게 마음 먹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의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최 노인의 일처리가 칠칠 맞지 못하다고 욕을 하면서도 그에게 계속 일을 맡기는 데에는 최 노인이 유일하게 외부인과의 접촉을 자원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주민들 마음이 시꺼멓게 썩어가는 동안, 마을을 떠받치는 대지에는 불 붙기 좋은 시꺼먼 찌꺼기 기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