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씨-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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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o - I will sleep hand in hand

 

 

 신호등 불빛이 깜빡였다.
 거리의 빗소리는 멎었고, 매미소리는 다시금 들리기 시작할 때.
 하늘을 가린 우산을 고이 접고, 긴 우산을 지팡이 삼아 두 손을 포개어 저 멀리 신호등을 바라보면,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먹구름 색 정장을 입은 아저씨는 거래처 사람을, 유채꽃 색 어린이 가방을 멘 엄마는 자기 아이를, 밤하늘 색 교복을 입은 학생은 같은 학교 친구를.
 모두 웃음을 지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는, 내 옆을 지나, 등 뒤로 사라진다. 가끔, 내 등 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뛰어오는 사람이 나타날 때도 있지만, 오늘은 없어 보였다.
 깜빡깜빡, 불빛은 여전히 깜빡였지만, 나는 건너지 않고 물웅덩이에 발을 살며시 올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을 건너는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건넌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건너지 않는 이유는, 아직 만날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만나야 할 누군가가 없다면 건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신호등이 깜빡거려도 그 옆에서 반대편 거리를 바라볼 뿐. 나는 건너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녹색의 신호등이 어느새 붉게 물들고 나서야 내가 만날 누군가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왔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걷는 그. 나른하게 걷는 발걸음에 한쪽 어깨에만 걸친 가방이 앞뒤로 흔들거린다.
 마치 우리를 빼고 모두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가 반대편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주위엔 자동차도 다른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나와 그, 그리고 신호등만 있는 세상.
 빨간불이지만 건너려는 욕심을 겨우 참아내며 신호등을 한 번, 두 번, 한 번 더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나서야 신호등은 이제 알아차렸다는 듯이 서둘러 초록색으로 변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보고, 하얀색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그도 내가 건너는 것을 보고 나서야 파란불로 바뀐 걸 깨닫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흰 부분만 밟으면 행운이 찾아올 거야. 조심스레 건너다보니 그가 어느새 내 앞에 서있었다.
 이번엔 모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와 그가 교차했을 때, 소리조차 멈춰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장조차 멈춰버렸는지, 아무 고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서서히 뛰기 시작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고, 내 등 뒤로 사라져간다. 나도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그의 등 뒤로 사라져간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 교차로, 이 횡단보도에서 언제나 기다린다. 비록 그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횡단보도에서 수없이 만났고, 수없이 엇갈리며 헤어져 왔다. 지금처럼. 나는 조용히 그가 모르게끔 뒤를 돌아봤다.
 비록 나와는 다르게,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아니기에 같은 속도로 걸어가지만, 왜인지 모르게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머뭇거렸다.
 그는 누구를 만나기 위해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걷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속 어딘가가 아려온다. 엇갈림에 아려오는 가슴께를 가벼이 누르며 한번 더 엇갈린다.
 볼 때는 길었지만, 걸을 땐 짧았던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그를 바라보니 어느새 그도 다 건너 저 멀리 희미하게 흐려져갔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전히 가슴께에 손을 올린 내 눈에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거렸다. 그 깜빡거림에 맞춰 내 심장도 두근거렸다.

 거리의 매미소리는 멎었고, 빗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할 때.
 하늘을 가릴 우산을 고이 펴고, 긴 우산의 손잡이에 두 손을 포개어 저 멀리 신호등을 바라보면,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위해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어쩌면, 나와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르겠지만, 각자 웃음 짓는 대상은 다르겠지만,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서로의 옆을 스쳐 지나가겠지만,
 나는 내일도 이 교차로, 이 횡단보도에서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은 이 교차로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왜냐면, 징검다리의 흰 부분만을 밟는다면 행운이 찾아올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