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괜찮습니까?"

 

 방금 전에 들었던 말이지만, 일단 장소가 다르다. 정말, 간신히 집 앞에 도착한 것 같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의 대답이라면, 안 괜찮다, 이것아.

 멘탈이 나갈 뻔 한 것을 간신히 추스려서, 마트에서의 소동은 일단락되긴 하였다. 약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정말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뒤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물건이 든 봉투를 잽싸게 뒤쪽으로 빼돌렸다. 점원에게는 좀있다 계산한다는 이야기를 괴성을 동반한 단말마로 짧게 전달하고, 계속해서 나의 연애사를 확인하려는 어머니에게는 아니라는 강한 부정과 함께 통화를 끊어 버렸다. 리돌은 그리고 내가 물건을 빼는 것을 결사적으로 몸으로 저지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결론은, 나는 내가 원하는 물건만을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고, 물건을 계속해서 담으려는 리돌에게 더 이상 장바구니에 무언가를 넣으면 없애 버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표정으로 구매 욕구를 없애 주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쳐 나왔고, 방금 전 어머니에게 잘못 들은 거라고 다시금 전화를 걸어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당분간 손자 소식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안내해 드렸다.

 

 "야, 누가 아무거나 집어와도 좋다고 그랬어?!"

 

 리돌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받았다.

 

 "다음 민재는 말했습니다. 가져 오면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고."

 

 "아니, 그놈의 번역기... 하아. 됐다."

 

 분명히 지금 채근을 해도 번역기 탓을 할 게 뻔하다. 근 며칠, 분명히 리돌이 쓰는 말투를 보아 할때 번역 상태는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는 있다. 근데 잘 알아듣고 잘 말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녀석이 '나는 번역기 때문에 말을 잘 못 알아듣소' 라는 사실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분명히 알아들었을 터인데,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 놓고서는 나중에 번역기 때문이라 변명을 하는, 그런 식이다.

 

 "리돌."

 

 "네, 민재."

 

 "너, 사실 이제 한국말 할 줄 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아직도 번역가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리돌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뭐 잘못되었냐는 표정으로 땡글땡글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하게 쳐다보고 있다. 허, 참.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 역시 별다른 말 없이 내 눈을 쳐다 본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표정으로. 이 녀석 보소?
 아, 이거고 저거고 일단 집에 올라가서 빨리 쉬고 싶다. 주말에 일할 때만 몰려오는 피로감이 방금 전 한 번에 찾아온 것 같다. 괜히 걸음이 빨라진다. 어서 내 보금자리에 드러눕고 싶다. 걸음을 재촉하여 계단을 바삐 올라가던 도중, 윗쪽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에 내 집 바로 아랫층에 누군가 이사하는 걸 보았는데, 그 때 온 사람인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윗쪽에서 내 모습을 먼저 확인하였는지, 저 쪽에서 건넨 인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일단 인사는 반갑게 받아 주는 것이 예의. 나는 고개 숙이며 화답하고서는 어떤 사람인지 보기 위해서 고개를 들었다.

 

 "우와?"

 

 사람 얼굴을 보고 초면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물론 실례 중의 실례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연예인도, 모델도 모두 이 사람 앞에 갖다 놓으면 한갓 해산물들로 보일 정도의, 엄청난 미인이 지금 우리집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딱 붙는 청바지에 민자 하얀 티 - 보통의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밋밋하여 소화하기 힘든 패션이지만 얼굴과 몸매가 모든 것을 커버하고 있다. 보통 그리고 외국인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금발로 물들인 머리를 하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느낌이 부자연스럽기 마련인데, 이 아가씨는 그런 것도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집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고서는, 계단 중간에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 하고서는 살짝 미소띄운 얼굴로 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올라가시지 않을 거면 조금 비켜 주실래요?"

 

 아차, 너무 넋을 잃고 쳐다 보았나?

 

 "아, 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한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얼어붙은 동작으로 자리를 비키며 군대식으로 대답을 해 버렸다. 금색 머리카락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눈길로만 좇으면서.

 

 "...괜찮습니까, 민재?"

 

 "으, 응!"

 

 얼마나 넋을 놓았던지, 리돌이 아랫계단에서 내 등을 톡톡 건드릴 때까지 나는 그 뒷모습을 쭉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멋적은 듯 리돌에게 대답하였다.

 

 "민재는 저런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합니까?"

 

 "야, 저거는 취향 문제가 아니야. 남자라면 누구라도 돌아볼 수 밖에 없을걸? 저 정도면 여신이지, 여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뻐."

 

 "그렇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번역기의 말은 이렇게 나오고 있었지만, 리돌의 표정은 상당히 뚱해보였다. 질투하는 건가?


 리돌은 그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의 등을 떠밀었다. 아, 그렇지.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지. 어쨌든 저런 사람이 내 집 아래 산다니, 자주 보면 좋겠네. 나중에 이사떡이라도 돌리지 않으려나?   희망찬 망상을 품으면서, 어느 새 다시 하얀 색깔이 된 오징어와 함께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같이 문으로 올라왔던 두 개의 시선이 다시 갈라진다. 나는 먹을 것에, 리돌은 TV에.
 장봐온 음식들을 냉장고 안으로 넣어 둔다. 일단 지금 국을 끓일 건 아니니까, 쇠고기랑 다진 마늘은 냉장실로, 라면에 같이 넣어 먹으려고 사온 만두는 냉동실로. 그리고 라면과 말린 미역은 찬장으로. 혼자서 먹기에는 차고 넘치는 양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누구와 같이 살아 본 적이 없다. 단순히 이걸 두 배로 생각하면 되는 걸까? 이걸 두 명이서 먹는다고 하면, 얼마나 빨리 없어질까가 궁금해 진다.

 사실 여느 흔히 볼 수 있는 소설에서 나오는 것 처럼 알콩달콩한 연출이 나온다던가, 아니면 형우놈이 이야기한 것 처럼 끈적끈적한 어른들의 속사정이 벌어진다던가 하는 것은, 근 일주일 동안 단 한번도 없었다. 나와 동거를 하고 있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물론 이것은 스치기만 해도 조상님을 뵈러 갈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흉기를 저 녀석이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 다르다.
 뭐랄까... 여자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 안 난다. 내 안에서 리돌은, 당연히 집 안에 있는 가구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녀석은 양철인간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건물을 홍해의 기적마냥 갈라버릴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도 겸비한, 달나라 사람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 한 두번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외관은 그냥 십대 후반의 미소녀다. 뭔가 음흉한 마음을 가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여지가 있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

 

 혹시...? 생각해 보니 요새 아침에 아랫쪽에 별로 감각이 없기는 했다. 갑자기 그 대사가 생각난다. '총알이 영 좋지 못한 곳에...'

 

 "뭐 합니까 민재?"

 

 "으아? 아, 아니야!"

 

 으어, 깜짝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애가 있는 앞에서 바지를 당겨 내 사타구니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돌은 저게 도대체 뭐 하는건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좀만 더 나갔으면 진짜 그냥 성추행범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사이에 식탁이 가려져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발정난 개 취급받았을 거다.

 

 "흠.. 흠. 잠깐 나갔다 올게."

 

 아무래도 그냥 이렇게 있으면 그대로 쓰레기 취급을 받을 것 같다. 저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무언가 분위기를 좀 환기하기 위해서 나는 예정에도 없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문을 열고 나갈 때, 살짝 쳐다 보았던 리돌의 표정에서는, 물음표가 나를 과녁으로 연속발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산책은 5 분도 안 되어 끝나고 말았다.

 

 

 

--------------------------------------------

 

집에 갔다 오느라고 하루 늦게 업로드했습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