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경험이자 추억거리를 떠올리며, 포르말린에 담긴 안구를 그윽히 쳐다본다. 양 옆에는 왼손 약지와 오른쪽 귀가 담긴 통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여전히 아픈 것은 싫었지만, 그 순간의 생생함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고, 영원히 남을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보물들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왼쪽 눈이었다. 


나의 몸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갔다. 꼴이 이러니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왕래는 끊어져 버렸고, 부모님한테 얼굴조차 비출 수 없는 신세였다. 그렇게 된 지 벌써 수 년째였다. 


딱히 외롭거나 하진 않았다. 나의 일부에 둘러 쌓인채 인생의 추억거리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게 계속되자 점차 타인들과 보냈던 시간들은 잊혀져 갔다. 나에게 호의를 가졌던 사람들도, 혐오를 품었던 사람들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무관심을 표했던 사람들도 차별없이 사라져 갔다. 

 

인생에서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져 버렸고, 그 이후로는 아무와도 관련되지 않으려고 했다. 감정을 표출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말수는 없어졌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썩을 정도로 넘쳐났다.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을 글로 옮겨 적기로 했다. 새롭게 찾은 즐거움이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상식과 도덕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남아있는 것은 뒤틀린 욕망과 본능의 행위들이었다. 내키는 대로 써내려갔지만, 단 한가지 지켜야할 원칙을 내세웠다. 


거짓 없는 사실만을 적을 것. 


다소 많은 것이 누락 되었을테고, 당시의 복받쳤던 감정이 고조되어 과장된 부분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정한 대원칙만은 준수하고자 했다.


기억 속에서 소재를 가져오고, 퇴고를 반복하고, 필요없는 것들을 잘라내고, 덧붙여야 할 것들을 추가한다.


처음 만족할만한 한 단락을 쓰는데 일주일이나 지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피로를 느꼈지만 계속 이어나갔다. 시간은 남아돌았고, 무엇보다 즐거웠다.


글을 계속 이어나갔다. 분량 같은건 정해두지 않았지만, 한 단락이 끝날때마다 나이프로 팔등을 그었다. 이제와서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약간 깊게 갈라진 상처에서는 호쾌하게 피가 흘러나왔고, 상처는 아주 깔끔한 선을 그렸다. 


그리고 어느샌가 흉터의 선은 팔등을 타고 한줄씩 쌓여가고 있었고, 처음에는 즐거움을 찾아 시작된 일이었지만, 이제는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거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 글은 그저 과정의 연속일 뿐,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았다.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시작이 없다는 것이 석연치 않은 점이었다. 


평범한 사람과 동떨어진 인생에 들어 서게된 계기, 그 출발점. 


내겐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비어진 도입부를 볼때마다 나는 항상 고개를 갸우뚱 거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