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꿔 오던 꿈이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뺨을 후려치자, 여자의 머리는 뒤로 튕겨져 나간다. 하지만 여자는 곧바로 무릎으로 기어가 남자의 앞에 꿇어 앉는다. 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여자의 배를 걷어찬다. 여자는 숨도 제대로 못쉬며, 고통을 호소한다. 남자는 그것을 보면서 미친 듯이 웃어댄다. 여자 역시 미친 듯이 웃어댄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퍼지면서 남자는 주먹으로 그리고 발로 여자를 때리는 것을 계속한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웃는 것을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섞여서 누구의 입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구별할 수가 없다. 꿈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자주 꾸는 꿈인데도 정작 꾸고 있을 때는 매번 새로운 장면을 보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고 두 사람의 행동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의 얼굴만은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는 생각은 했지만,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감흥도 없어져서 또?라는 정도의 느낌만 들었다.


이 꿈 역시 내 인생에서 긴 시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내용에 넣으려 했지만, 좀처럼 잘되지 않아서 누락된 부분 중에 하나였다. 


누락된 부분이야 많았기에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지만,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그 꿈을 꾸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가장 아끼는 왼쪽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눈을 보면 항상 부모님이 생각났다.


모든걸 털어놓던 날. 나를 쳐다보던 부모님의 눈빛이 떠오른다. 항상 다정했던 눈길이 아닌 공포가 서려있는 그 눈빛. 지금 생각해보면 혐오감까지 배여 있었던 것 같았다. 


여태까지 쭉 그 눈빛에 얽매여 있었다. 상처를 받았고, 위안으로 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옅어진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더 이상 원망도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을 터 였다.


하하...


메마른 웃음이 새어나왔고, 무언가가 볼을 타고 내려오는게 느껴졌다. 따뜻하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눈물은 쉴새 없이 흘러나온다.


기억이 난다.


그 날 부모님이 왜 그렇게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셨는지, 그 눈에 어린 공포심의 정체도 이제서야 알것 같았다.


아버지는 상처를 입히는 나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셨고.

어머니는 상처를 입은 나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셨다.

나의 모습은 바로 과거의 당신들의 모습이었다. 


가장 믿어왔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오롯이 타인이였다. 누구도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독감에 발버둥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버둥치지 않게 되었지만,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가슴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남은 채 만지지 않으면 느껴지지도 않을 오래된 상처 정도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 타인 같은게 아니야.   


참지 못하고 이내 오열하고 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분명한 당신들의 아들입니다...


눈물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고, 나는 무언가를 토해내 듯이 처절하고도 필사적으로 흐느꼈다.



앞 부분을 모두 채워 넣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소중하게 모아서 문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억은 흐릿했고, 거의가 감정에 의존하는 부분이었기에, 사실 만을 써야한다는 대원칙에는 위배된다.


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믿었기에 도입부는 순조롭게 채워져 나갔다. 


전보다 강한 충실감이 펜을 움직인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계속 글을 써내려 가자.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을 완성시키자. 


도입부를 완성하고 또다시 팔목에 칼질을 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팔목에 촘촘하게 그어진 일자 흉터들은 팔꿈치를 지나 어깨죽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걸로 써내려 가야할 이야기들은 모두 글로 옮겨 적었다. 


이제부터는 일어날 일들 만을 기록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책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기 마련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이든. 그 변화성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나는 지금의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랬다. 모순이었다. 그렇기에 결말을 완성 시키자고 다짐을 했을 때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맺을 것인지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미련은 남아 있었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 행복이 무뎌지고 빛바랜 채로 살아가기엔 남은 삶은 너무나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