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으음...'


"왜 그래? 아까부터 뚱한 표정이나 짓고 있고."

"엉? 내가 그러고 있었냐?"

"그렇다니까. 세열아. 너에게서 볼만한 건 그 초딩같은 얼굴과 작은 키 밖에 없으니까 좀 헤실헤실 웃고 다녀라."

"니 키도 압축해서 눈높이 똑같이 만들어줄까?" 


'어이쿠'라 너스레치며 물러나는 녀석은 반 친구인 아혁이다. 키 작은 나와 달리 180에 가까운 키와 휜칠한 어깨 덕분에 인기도 참 많은 녀석이다. 


그에 반해 나, 연세열은 키가 좀 작다. 아니 키만 작은게 아니라 좀 여러가지로 많이 어려보인다... 쩝.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건, 어제 밤에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랬다. 저녁도 안먹었고, 방에서 놀다가... 뭐했지? 그냥 잤나? 


기억이 어디 한 순간부터 노이즈가 낀 것 마냥 불투명했다. 이걸 어떡하지... 오늘은 딱히 숙제도 없었고, 그냥 넘어가면 되려나.


"어. 야야, 저기 봐라."

"응?"


아혁이가 갑자기 내 머리를 잡고 고개를 틀게 했다. 거기에 수도 허리치기로 응수하고, 그 쪽을 보니... 흰 머리카락의, 우리 학교 교복의 소녀가 있었다. 


시원국제사립고등학교. 엄청 넓은 학교의 넓은 학교 정문, 긴 이름만큼 넓직한 문패에 그 소녀가 기대어 서 있다.


"뭔데?"

"지은 선배라고. 3학년 학생회장이자 퀸카. 몰라?"

"아... 그러고보니 단상 앞에 있는걸 본 것 같다."

"어휴."


난 적당하게 대답한 것 같은데. 대답받는 이 놈 표정이 이상하다. 얼굴이 실룩댄다.




"저 사람은 학원의 아이돌, 모두의 숭배 대상이자 절벽 위의 꽃이지. 우리 학교 학생회는 남녀 상관없이 다 그렇지만. 아, 너에게는 연희 선배가 있으니까 상관 없나."

"그 선배는 절대로 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리고, 말하는 너도 별 마음 없어보이는데."


내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그는 한번 웃더니,


"뭐, 나는 진작에 포기했지. 그리고 나는 내가 고백해서 연애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아 그러세요, 죽여버리자. 사람을 반 죽이는 듯한 고통을 주는 허벅지 니킥. '끄오오오'하는 소리가 참 애처롭구나. 


'응?'


내가 넓은 교문을 넘어설 때까지, 왜인지 저 학생회장이 나를 계속 바라보는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자의식 과잉이겠지. 교문을 넘으면 각도상 시선은 끊긴다. 그래서, 나도 그냥 넘어갔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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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넓어서 카페테리아도 넓다. 아 보통은 학교 식당이라고 말하는데 여긴 그렇게 말하기 뭐할 정도로 넓다. 게다가 점심 시간은 자유로운 외출이 가능한 특이한 학교라 사람 밀도는 낮다. 


나 같은 소시민의 심장에는 별로 좋지 않은 곳이었다. 몇달 생활하니까 괜찮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이런 고급진 곳에서 멀쩡히 메뉴로 팔고 있는 특대 라면 같은건 차마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허나 눈 앞, 같은 원형 테이블을 나눠쓰고 있는 이 선배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카페테리아 메뉴가 갱신된 날부터, 첫 메뉴부터 차별없이 순서대로만 주문했던 선배의 오늘 메뉴는 샌드위치. 하얗고 작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보고 있으니 선베의 청록색 눈동자도 똑같이 지긋이 이쪽을 바라본다. 의문을 표하는 고개 까딱 동작에 같은색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린다. 




레키. 우리나라 이름은 연희. 사소한 계기로 나를 살려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세상에 둘도 없는 초고교급 멘토. 


선배랑 나는 가끔 밥을 같이 먹는 사이다. 연희 선배는 말 수가 별로 없는데, 그럼에도 같이 먹는 일이 많다. 그 자리에서는 보통 아무 이야기도 없거나, 내가 내 생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좋은 분위기따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같이 밥을 먹는건------




'왜지.'


잘 모르겠다. 선배한테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도 우리는 합석같이 않은 합석을 한다. 나는 대충 아무말이나 꺼냈다.


"그러고보니 오늘, 학생회장이 교문 앞에서 저 보고 있던거 같던데."

"?"


선배가 또 머리위에 물음표를 세웠다. 이 사람, 말이 없는 주제에 꽤나 여러가지를 알고 있어서 혹시나 물어봤지만... 틀렸나.


"자의식 과잉?"

"...그러려나요."


그리고 꽤나 직설적이기도 했다. 던지는 말들에 날카로운 쐐기가 많은 사람이다. 모습과 안어울리게 말이다. 




"...그럼, 만난 적. 밤에."

"왜 밤이라는 구체적인 시각을 덧붙였는지 묻고싶지만... 아니네요. 아, 어젯밤은 기억이 없으니 어디서 술마시다 만났을 수도?"


그러고보니, 나 어제 밤 기억이 없었지. 혹시 만에 하나 그럴까봐 살짝 닭살돋는데.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내 몸에는 취기도 없고, 몸에도 술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덧붙이자, 선배가 명령했다. 


"기억, 재생해."

"------네."


즉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내 기억의 타임라인을 불러내 삭제된 기억 앞뒤를 파악했다. 




------경험과 지식은, 뗄 수 없는 관계. 


눈 앞에 손톱깎이가 있다고 해보자. 내가 그 수수께끼 소도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그 손톱깎이 사용 방법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면 나는 그 물건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누군가가 그 물건을 한 손에 집게 하고 다른 쪽에 손톱을 들이밀어서 손톱을 깎게 한다고 치자. 이 경우에 나는 손톱깎이에 대한 '지식'과, 그 '경험'을 동시에 얻는 셈이 된다. 즉, 경험은 지식으로 변환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지식 역시 경험으로 변환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고작 0과 1의 배열일 뿐인 파일들은, 언제든지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프로그램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지식이 경험으로 변환된다는 '이론'. 




그 얼토당토 않은 '이론'은, 나는 항상 무장하고 있다. 생각에 집중하자 내 머릿속에 새로 갱신된 정보의 배열이 떠오른다. 마치 수학의 수식을 외웠듯, 화학의 주기율표를 외웠듯 내 머릿속에 있는 코드들. 거기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빼고, 나머지를 머릿속에서------ 변환시킨다. 


선배에게서 배운, 자기암시나 최면의 일종. 내가 그 코드에 집중하자마자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에 생겨난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영상이, 만들어진다. 


'...!!'


그 영상에서,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3화